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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아비투스

과격한 여성인권옹호자가 왜 왕정제 폐지를 반대했을까?

by rba_jin 2025. 10. 15.

과격한 여성인권옹호자가 왜 왕정제 폐지를 반대했을까?

1. 과격한 여성 인권 옹호자들이 왕정 폐지를 반대한 역설

프랑스 혁명 초기, 올랭프 드 구주와 같은 과격한 여성 인권 옹호자들이 왕정제 폐지에 대해 망설이거나 심지어 반대했던 것은 단순한 충성심 때문이 아니었다. 이는 여성에게 '주체적인 권력'이 허용되는 사회 구조에 대한 현실적인 계산이었다.

  • 여성 통치자의 가능성: 왕정제에서는 비록 형식적일지라도 왕비나 섭정, 여왕(미래의 가능성)을 통해 여성이 국가의 최고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균열'이 존재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비로서 영향력을 행사했듯이, 왕실 혈통이라는 특권은 여성에게 정치적 발언권을 부여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 혁명 후의 퇴보: 그러나 혁명을 통해 들어선 공화정 체제는 '자유, 평등, 박애'를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유와 권리를 오직 남성 시민에게만 한정했다. 혁명 지도자들은 여성의 정치 참여를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인 영역으로 치부하며 공공연히 배제했다.
  • 권력의 실질적 축소: 여성 인권 옹호자들은 왕정 폐지가 여성에게 '최고 권력'에 접근할 단 하나의 길마저 영원히 닫아버리고, 남성들로 구성된 의회 중심의 공화정 속에서 여성의 권리가 더욱 축소되리라 예측했다. 실제로 혁명 후 여성 참정권 운동은 탄압받았고, 여성 클럽은 해산당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왕정 유지는 여성의 권력이 제도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유일한 통증(痛症)이자 통로였던 것이다.

2. 마리 앙투아네트: 억압된 자유를 향한 갈망과 감정 이입

    오스트리아의 공주로 태어나 14세에 프랑스 왕세자빈이 된 마리 앙투아네트

함스부르크와 베르사유의 문화적 충돌

  • 오스트리아의 '자유로운' 가정 문화: 마리 앙투아네트는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가정적인 분위기의 함스부르크 가문 문화 속에서 자랐다. 그녀에게는 개인의 사생활과 편안함이 익숙했다.
  • 프랑스 왕실의 '전면 공개' 문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정의 왕과 왕비의 일거수일투족 귀족과 평민에게 공개되는 스펙터클이자 정치적 의무였다. 기상부터 식사, 옷을 입는 것까지 모든 것이 복잡한 '알현 의식'의 일부였으며, 그녀는 사소한 순간조차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감옥과 같은 무대에 갇혔다. 시할아버지(루이 15세)의 애첩과의 충돌 역시, 복잡한 프랑스 궁정의 정치적 역학 관계에 적응해야 했던 고통의 단면을 보여준다.

자유를 위한 '탈출'과 비난의 증폭

  • '자유로움'의 재건: 왕비가 된 후, 마리 앙투아네트가 법(관습)을 폐지하고 축소하며 베르사유궁전을 떠나 별장(프티 트리아농)에서 지내려 했던 행동은 단순히 사치를 부린 것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에서의 자유롭고 가정적인 분위기를 재현하고 자신만의 시간을 즐기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였다.
  • 공주와 여성의 권리: "여성이 공주가 되고 싶어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닌 것처럼," 마리 앙투아네트의 '자유를 향한 욕구' 자체는 인간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절대왕정 시대의 왕비에게 '사생활'과 '자유'는 곧 국가 의무의 방기로 해석되었다.
  • 가짜 뉴스와 희생양: 그녀의 이러한 '자유 추구'는 귀족들의 질투와 국민들의 오해(가짜뉴스)를 증폭시키는 빌미가 되었고, 결국 그녀는 혁명이라는 격변 속에서 몰락하는 왕정제의 모든 부패와 모순을 짊어진 상징적인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은 시스템 속에 갇힌 여성 권력의 한계 개인의 본능적 자유가 시대적 요구에 의해 어떻게 처참하게 짓밟힐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시대를 뛰어넘어 내가 페미니즘을 논하며 그녀에게 감정 이입하게 되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