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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아비투스

납골당봉안당,그리고 디지털추모의시대

by rba_jin 2025. 10. 17.

 
 

아버지의해방일지_정지아소설


‘아버지가 죽었다.’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로 시작하는 소설이 있다.

첫장면부터 경이로움을 금치못한 정지아 작가님의 소설이었다.충격적이었지만 작가는 그래도 성인이 되어 아버지가 돌아가셨기에  나보다는 좀 더 풍요로운 어린시절을 보냈을 것이라 생각한다.

고령화 시대 ,, 이제 죽음은 특별하지도 않다.

https://www.blogger.com/blog/post/edit/3590320299112749053/1445973172887095324
 
나는 과거를 중심으로 기록하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가 맞을 것이다.

7살에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내 나이 일곱 살에 그 사실을 받아들였을까?
학교 들어가기 전 까지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다.
도움을 받던 아이에서, 창피함을 감추기 위해 새벽마다 도시락을 싸는 아이로 변하기 까지는

 
김치를 볶고, 단무지를 무치며, 엄마의 마음을 조금씩 배워갔다.
엄마는 그날의 한을 평생 안고 사셨을 것이다.
꽃 같던 그녀의 눈빛, 이해하지 못했던 어린 나.
나는 아버지 없는 아이로, 가난 속에서 성장했다.
엄마는 우리를 남 다르게(?) 사랑했던 것 같다.
도시락에 나물, 김치 한 조각  이라는 정성을 담았지만, 철없는 아이는 계란말이나 소시지를 더 좋아한다는 것을 인지하지 않으셨다.
절약이 곧 사랑이었다.
학교를 보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엄마마저 쓰러지면 안 되니까.

48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아버지를 '양평납골당'으로 모셨다.

'파묘'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화장을 해서 '봉안'을 했다.
봉안은 화장한 유골을 안치하는 것을 공경스럽게 이르는 표현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영화로만 봤던 파묘.. 오빠가 '개장신고'까지 마치고 단톡방에 알렸다.
명절에 아버지 산소에  가지못한 일들이 많았다.
이래서 딸은 안돼...
오빠가 늘 성묘를 하고 사진을 단톡방에 올렸다. 그때마다 미안했는데 올해 양평납골당으로 모셨다.
윤달이 있는 시기에 이장을 한다고 지난해 부터 단톡방에서 오가던 이야기가 오빠의 결정과 언니의 결단으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지만, 신해철의 죽음은 또렷하다.

“Here, I Stand for You.”
그의 노래는 내 10대 후반과 20대의 청춘을 관통했다.
잠 못 이루던 밤, 라디오 속 그의 목소리와 함께 울고 웃던 그 시절.

그리고 샐린 디온의 ‘아빠와 함께 춤을(Dance with My Father)’을 들을 때마다, 눈물이 흐른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나도 그 노래의 소녀처럼 아빠의 품에서 춤을 출 수 있었을까.
아버지가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그 부재의 공간을 음악으로 채워왔다.
 
이제 나는 안다.
죽음은 고령화 시대의 일상 속에서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사건이 되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는, 여전히 한 사람의 세계를 무너뜨린다.
음악은 부재 속에서도 사랑을 전하고,
기억은 사라진 자리를 다시 살아 있게 만든다.
아버지도, 신해철도, 그리고 나의 엄마도 —
어디선가 빛나는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그렇게 믿으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