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에세이 『허송세월』서문에는 “늙기의 즐거움”이라는 구절이 있다.
'늙기의 즐거움' 첫줄은 이렇게 시작된다
“핸드폰에 부고가 찍히면 죽음은 배달상품처럼 눈앞에 와 있다.”
이 짧은 문장 속에는, 죽음이 얼마나 일상 속으로 들어왔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제 죽음은 먼 이야기나 철학적 주제가 아니다.
액정 화면 속에서 부고는 몇 줄의 문자로 도착하고, 그 아래에는 조의금을 받을 은행계좌가 또렷하게 찍혀 있다.
죽음은 ‘확실히 배달된 현실’이면서도,
그 형식은 너무나도 디지털적이고 간소화된 허구처럼 느껴진다.
디지털 영혼의 시대
이 문장을 읽으며 문득 생각했다.
‘AI가 기억하는 나’는 어떤 모습일까?
내 삶의 데이터와 영상이 클라우드에 저장되고,
내 목소리로 만든 AI가 가족의 질문에 대답하는 시대가 왔다.
그때 나의 딸은, 화면 속의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그녀에게 나는 살아 있는 추억일까, 아니면 단지 디지털 영혼의 잔상일까.
나는 한때 그렇게 생각했다.
삶을 기록하고 남기는 것이 결국 자녀를 위한 복지라고.
그래서 인터넷 강좌로 사회복지 영상을 촬영했다.
내가 세상에서 사라진 뒤에도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싶을 때, 이 영상을 보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납골당, 기억을 모시는 곳
얼마 전, 아버지를 파묘 해 납골당으로 모셨다.
그때 처음 느꼈다.
죽음의 공간이 기억의 공간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을.
며칠 전 명절이 끝나자마자, 새언니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부고가 도착했다.
요즘은 부고도 메시지처럼 ‘배달’된다.
죽음은 이젠 하나의 일상 과업처럼 느껴진다.
그 소식 앞에서 나는 늘 얼굴을 내밀어야 하는 어른의 의무를 떠올린다.
하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참여하지 못할 때면,
그 부재가 새언니에게 진 빚처럼 불편하게 남는다.
함께 모시는 위로
다행히 이번엔 아버지 옆으로 모시게 되었다.
1977년에 돌아가신 분과 2025년에 돌아가신 분이
한 납골당에 나란히 계신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위로가 되었다.
“이제 추모할 때 함께 와도 되겠구나.”
그 순간, 나는 올케와 조금 더 가까워진 듯한 마음이 들었다.
죽음이 관계를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다시 연결시켜 주는 다리가 되어 있었다.
메타버스와 미래의 납골당
코로나 시절, 나는 한때 메타버스가 장례문화를 완전히 바꿔놓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 시기 나는 나이 든 세대가 기술을 낯설지 않게 느끼도록
열심히 새로운 플랫폼을 배우고 있었다.
노인 인구가 늘어나면서 납골당도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멀리 떨어진 가족끼리 함께 추모하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상상해본다.
미래의 납골당은 단순히 유골을 모시는 곳이 아니라,
남은 자들의 기억을 전시하는 공간,
즉 메타버스 추모관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목소리로, 영상으로, 글로
사라진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죽음은 사라짐이 아니라
기억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존재 방식이 될 것이다.
이제 장례문화는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억을 보존하는 기술로 변화하고 있다.
AI와 메타버스가 만들어낼 새로운 추모문화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따뜻함을 다시 배우게 될지도 모른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기억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다.”
나의 청춘을 함께했던 마왕 신해철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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