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은 벌이 아니다: 정갈한 음양탕 한 잔과 함께 읽는 데카당스의 사유"
세상은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이나 영화 <은교> 를 보며 '선정성'이라는 얄팍한 라벨을 붙이곤 한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곳엔 욕망보다 처절한 '상실에 대한 애도'가 자리 잡고 있다.
1. 거울 속의 타치오, 거울 밖의 이적요
아셴바하가 소년 타치오에게 매료된 것은 성적 소유욕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르키소스가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빠져들었듯, 이미 상실해버린 자신의 찬란했던 과거를 소년이라는 거울을 통해 대면했기 때문이다.
영화 <은교>에서 이적요가 읊조린 대사는 노년의 무력감 앞에 선 인간의 주체적 선언과도 같다.
"너희의 젊음이 너희가 잘해서 상으로 받은 게 아니듯이,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신체적·정신적으로 색채를 잃어가는 시기에 마주한 눈부신 젊음은, 갱년기의 열병을 앓는 우리에게도 때때로 데카당스(탐미적 몰락)의 유혹으로 다가온다.
2. 데카당스: 무너짐 속에서 꽃피는 탐미주의
아셴바하가 전염병이 도는 베네치아를 떠나지 않고 화장을 하며 타치오를 쫓는 모습은 전형적인 데카당스의 극치다.
- 몰락의 미학: 파멸을 예감하면서도 아름다움에 매몰되는 것. 그것은 갱년기나 노화라는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 앞에 선 인간이 부리는 마지막 '주체적 반항'일지도 모른다.
- 메타포로서의 소년: 타치오는 아셴바하에게 단순한 성적 대상이 아니라, 그가 평생 지적·금욕적으로 쌓아온 상징계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순수한 실재'의 메타포 다.
3. 너무 열심히 산 이들의 ‘억울함’에 대하여
드라마 '미스홍'을 보면 주인공 금보가 미숙에게. "너무 열심히 하면 억울해지는 일이 온다."는 말을 한다.
사회복지 슈퍼바이저로서 현장을 지켜보며 나는 깨닫는다. 평생을 국가와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골든아비투스'를 일궈온 이들이, 노화와 질병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낙오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 국가의 보호막: 국가는 열심히 산 사람들의 삶이 '벌'이 되지 않도록 든든한 사회적 안전망을 제공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상생과 공존'의 핵심이다.
- 사소한 정의의 실천: 낙오자를 만들지 않는 정책, 그들의 품격을 지켜주는 시스템을 고민하는 것이 나의 변하지 않는 '선한 영향력'이다.
4. 지성에서 영성으로: 늙음을 환대하는 법
라캉의 말처럼 우리는 늘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제는 그 거울을 깨고 나와야 한다.
젊음이 상이 아니듯, 늙음 또한 벌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다른 성분의 삶'으로 이행하는 과정일 뿐이다.
내가 강단에서 뿜어내는 에너지가 갱년기의 고통을 잊게 하듯, 우리 각자가 품은 '20%의 열정'이 80%의 노화를 빛나게 할 것이다.
" 갱년기의 열병 속에서도 강단에서 빛나는 에너지를 뿜어내는 시간들은 또 다른 행운을 마중 나가는 정갈한 기다림이다."
맺음말: "여러분의 삶이라는 자루에는 지금 어떤 해석이 담겨 있나요? 억울함 대신 '행운'을 마중 나가는 사유의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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