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 멈춰선 시간, 그 너머의 안부
어쩌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똑같은 모양의 지도가 하나씩 들어있는지도 모른다.
세월의 먼지가 내려앉아 흐릿해졌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를 부르는 그곳.
나 또한 모처럼 어릴 적 기억의 조각을 찾아 외갓집 마을로 향했다. 구글맵으로 옛 지명을 검색하니 신기하게도 길이 나타난다.
디지털의 세상 속에 여전히 숨 쉬고 있는 아날로그의 흔적을 따라, 나는 시간이 멈춰버린 곳 ‘판대역’으로 들어섰다.
(판대역은 양평과 원주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어 원주판대리에서 양평삼산리로 지명이 바뀐 곳이다)


지자체마다 폐역을 화려한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지만, 이곳은 그저 방치된 채 버려져 있었다.
쓰레기가 쌓이고 적막만이 감도는 그곳에서 우리를 반긴 것은 다리를 다친 고양이 한 마리 뿐이었다.

역에서 내려 간현역 방향으로 외가까지 걸어가던 십 리 길. 이제는 폐허가 된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우거진 숲길과 눈길 사이로 잊혔던 풍경들이 점점 익숙한 얼굴을 내민다.



그 시절, 작은 발로 꾹꾹 눌러 걷던 길 위로 이제는 다리와 매끈한 도로가 놓였다.
"이곳이구나!" 하는 환호성이 터져 나온 순간, 차가운 겨울바람이 뺨을 스친다.
7살 어린 나를 두고 일찍 떠나신 아빠가 바람이 되어 "잘했다, 여기까지 잘 왔다"며 응원을 건네는 것만 같았다.
마을은 깡그리 변해 있었다. 외할머니가 정성껏 고추 농사를 지으시던 눈 덮인 밭길엔 화려한 캠핑장이 들어섰고,

마을 뒤편엔 요양원이 자리 잡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변한 그곳에서도 가래나무 터와 마을의 공동 빨래터만은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수줍게 몸을 낮춘 채 우리를 반기는 옛 숲길을 보며 나는 "그래,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와서 뭐 하냐며 고개를 저으시던 친정 엄마의 발길이 오르막길에서 갑자기 빨라진다.
"여기가 철환이네 집터야,
"여기가 경숙이네..."
엄마는 사라진 논을 아쉬워하면서도,
어느새 기억 속 친구들을 소환하며 얼굴에 평온함을 띄우신다.
그땐 그저 겉멋에 걸맞지 않은 가난이 너무 부끄러워 피하고만 싶었던 곳이었는데,
이제는 그 가난마저도 우리의 어린 시절을 구성하던 소중한 풍경이었음을 깨닫는다.
나이를 먹고 혼자 차를 몰고 왔을 때는 아무리 애를 써도 찾을 수 없던 길이었다.
하지만 오늘, 엄마와 함께 걷는 이 길은 잊히고 버려지는 세상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추억의 힘을 증명해 주었다.
숲속 오르막길 끝에서 만난 것은 변해버린 마을이 아니라,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여전히 따뜻하게 남아있던 '나' 자신이었다.

그 자리에 교회가 들어섰다는데.골프장이 들어섰다고 들었어
무성한 소문일 뿐 이었다는 것.
외가 터는 그대로 있었다.
비록 잘라져 뼈대만 남아 있는 나무가 버티고 있었지만 그 나무가 있던 자리가 예전의 쉼터 였음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우리 세자매를 기다렸다는 듯 모두가 한마음으로 이곳에 와 있었다.

PS: 외가는 외동이신 외삼촌이 결혼을 하면서 연로하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서울로 모시게 되면서 추억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엄마는 맏이셨고 외삼촌은 막내셨다. 외삼촌은 우리언니와 나이차가 몇살나지 않아 우리는 어린시절 외삼촌과 함께 어린시절을 보냈다.
엄마가 결혼을 하시고 37세에 과부가 되면서, 우리들은 외가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엄마는 늘 일을 하느라 자녀들을 챙길 수가 없었고
우리들은 외가에서 지내는 일이 많았다.막내는 3살부터 외가에서 지냈고 외할머니가 엄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적이 있었을 정도라고 한다.
오늘 판대근처 팬션에서 1박을 하면서 지난추억을 이야기 하며 엄마와도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모처럼 우리 세자매 힐링의 시간을 가졌다.
엄마 사랑해요..그동안 너무 고생많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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