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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투스강의실/사회복지미션

타자화는 어떻게 재생산되는가?

by rba_jin 2026. 4. 14.

호텐토트 비너스라는 격자를 깨고: 세라 바트만의 존엄을 복원하며

 

세라 바트만은 '호텐토트 비너스'라는 이름으로 유럽 전역에서 전시되었다.

이는 단순한 인종차별을 넘어, 여성의 신체를 철저히 '타자화'하고 '도구화'한 젠더 폭력의 전형이다

위계적 사회가 아님에도 타자화 된 모습 인간은 평등하다고 할 수 있나?

1. ‘이미지’에 의한 존재의 추상화와 기호화

세라 바트만은 살아있는 인간이 아닌, 유럽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한 '표상(Representation)'으로 소비되었다.

 

  • 기호로서의 신체: 그녀의 신체 특징(스테아토피기아 등)은 서구 여성의 미(美)와 대비되는 '비정상'과 '야만'의 기호로 추상화되었다. 손택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는 한 명의 주체적인 여성이 아니라 관람객들의 시각적 쾌락을 위해 박제된 '이미지 조각'이었다.
  • 지역성의 소멸: 그녀가 코이코이족으로서 가졌던 고유한 역사와 가족, 개인의 감정(지역성)은 완전히 소거된 채, 오직 '전시물'이라는 보편적 비극으로 일반화되어 소비되었다.

2. 제국주의적 ‘남성성’과 여성 신체의 도구화

그녀를 전시한 주체는 백인 남성 중심의 제국주의 과학과 자본이었다.

  • 관음증적 통제: 그녀의 신체를 해부학적으로 분석하고 전시한 행위는, 여성의 신체를 정복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제국주의적 남성성의 과시였다.  "타인을 도구로 쓰는 관계"의 가장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형태다.
  • 2차 피해의 영속화: 그녀는 죽은 뒤에도 뇌와 생식기가 박제되어 1970년대까지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이는 사회복지사로서  '2차 피해 방지'와 '존엄한 예우'가 완전히 결여된, 영속적인 젠더 인권 침해였다. 

3. ‘자기통합감’의 강제적 해체

세라 바트만에게는 자신의 삶을 일관된 흐름으로 잇는 '자기통합감'을 가질 기회가 박탈되었다.

  • 분리된 자아: 고향에서의 삶(실재)과 유럽에서의 전시(이미지) 사이에서 그녀의 자아는 철저히 파편화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拏)로 움직이는 주체가 아니라, 타인의 욕망에 의해 분리되고 추상화된 존재로 살아야 했다.

4. 인종/ 젠더적 아비투스가 낳은 구조적 폭력

세라 바트만의 비극 역시 단순한 개인의 불행이 아닌, 당시 유럽의 인종·젠더적 '아비투스(Habitus)'가 낳은 구조적 폭력이었다.

  1. 실재의 회복(拏): 2002년 그녀의 유해가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기호로 남겨졌던 그녀를 다시 '실재하는 인간'으로 복원하는 뒤늦은 '주체적 행동'**이었다.
  2. 함께를 고민하는 연대:  우리는 타인을 구경거리(스펙터클)로 삼는 '차별'이 아닌, 그들의 아픔에 곁을 내어주는 '함께'를 고민해야 한다.
  3. 맑은 물길(沅)의 흐름: 세라 바트만의 슬픈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과거의 어둠을 씻어내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치유의 서사'를 쓰는 작업이기도하다.

  배트맨비긴스의 명대사

It’s what you do that define you.

'너를 정의하는 것은 네가 하는 행동이다' 라는 말이 떠오르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