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첫 장면처럼,
기차가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오면 눈앞에는 온통 하얀 세상이 펼쳐지곤 했다.
어린 시절 겨울방학, 판대역에서 내려 외가까지 걷던 그 십 리 길은 나에게는 바로 그 설국으로 들어서는 입구같다.
이제는 그 멀고 험했던 길 위로 매끄러운 도로가 나 있지만,
내 기억 속의 눈길은 여전히 차갑고도 포근한 원형의 풍경으로 남아 있다.
도시의 밤은 전등 스위치를 끄듯 갑작스럽게 찾아오지만, 시골의 밤은 다르다.
낮은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나고,
밤은 수줍게 앞을 나오며 서서히 서로의 자리를 바꾼다.
그 느릿한 변화의 틈새에서 나는 그리움을 배운다.
가본 적도 없는 시골의 폐교된 초등학교 건물을 보며 묘한 향수를 느끼는 것은,
아마도 그곳이 누군가의 찬란한 유년을 품어냈던 '커다란 나무' 같은 장소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그 학교는 어르신들의 쉼터이자 요양원이 되었다.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깊은 산골에 요양원이 있다는 사실이 때로는 슬픔으로 다가오지만,
그곳은 동시에 누군가 반드시 맡아야 할 고귀한 임무가 기다리는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쩌면 내가 사회복지사로서 꿈꾸는 '실천적 촉진자'의 소명이
그 낡은 교실 복도 어딘가에 닿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일곱 살, 너무 이른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던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아니라 사정이 있어 잠시 생이별한 것이라 믿고 싶었는지 모른다.
죽음을 거부함으로써 존재를 지키고 싶었던 어린 날의 간절함은 이제 어머니를 향한 부지런한 발걸음으로 변했다.
어머니의 부재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무게이기에,
나는 오늘도 스스로와 약속한다.
부지런히 고향으로 내려가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하겠다고 말이다.
어느덧 산으로 새들이 돌아가고 저녁 하늘은 붉게 물든다.
동쪽 하늘에는 도시에서는 자취를 감춘 ‘개밥바라기별’이 가장 먼저 반짝이기 시작한다.
어머니의 젊은 해마가 여전히 건강하기를,
그리고 우리의 이 소중한 추억들이 저 별처럼 오랫동안
우리 앞길을 비춰주기를 기도해 본다.
'골든아비투스 > 50+리부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에세이12] 부끄러운 이름을 흙으로 덮고, 다시 쓰는 ‘리스타트’ (0) | 2026.02.10 |
|---|---|
| [편지11]딸에게 건네는 엄마의 '갈매나무' 편지 (0) | 2026.02.10 |
| [에세이9]세자매의 ‘별 헤는 밤’ (0) | 2026.02.09 |
| [시8] 예감의 그림자 (0) | 2026.02.08 |
| [에세이7] 고운 손에 숨겨진 굳은살의 고백 (0) | 2026.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