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 적 외가에 가면 할머니는 늘 나를 곁에 앉혀두고 케케묵은 이야기를 꺼내셨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이야기는 어린 내게 참으로 시시하고 재미없는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하지만 할머니는 마치 처음 하는 이야기인 양, 매번 간절하고 열정적으로 당신의 고단했던 소녀 시절을 복기하셨다.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는 일찍 여읜 어머니와 새어머니, 그리고 동갑내기 의붓자매가 등장한다.
새어머니는 친딸에게는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애지중지하며, 모든 설거지와 궂은일을 어린 할머니에게 몰아주었다고 했다.
"얘야, 그 애는 손이 약해서 설거지 한 번만 해도 손등이 쩍쩍 터져나갔단다.
그래서 내가 다 했지. 그런데도 네 할아버지는(친정아버지는) 내가 동생 일을 안 도와준다고 나만 혼내셨어."
할머니는 억울하고 서러웠던 그 시절을 회상하며 항상 마지막엔
"나는 아무리 일을 해도 손이 참 곱다"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그땐 그 말이 그저 타고난 피부를 자랑하시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제야 알 것 같다. 그 '고운 손'은 타고난 축복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한 채 스스로를 단단하게 다져야 했던 한 어린 소녀의 눈물겨운 생존 전략이었음을 말이다.
터질 기회조차 얻지 못할 만큼 혹사당하며, 할머니의 손은 상처보다 먼저 굳은살로 스스로를 무장해버린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나는 이제 할머니가 그토록 강조하시던 그 '고운 손'의 의미를 조금씩 알아간다.
요즘 나의 유일한 힐링은 네일아트다. 화려한 색을 입히고 반짝이는 파츠를 올린 내 손을 보면,
누군가는 내가 집안일 하나 안 하고 곱게 자란 줄로만 안다.
하지만 나는 네일아트를 한 채로 산더미 같은 설거지를 해치우고,
집안 곳곳을 쓸고 닦는다. 그럼에도 내 손톱은 멀쩡하고, 손등은 여전히 매끄럽다.
문득 거울 속의 내 손을 보며 할머니를 떠올린다.
내 손이 멀쩡한 것은 내가 일을 덜 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그 '강인한 유전자'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 이제야 알 것 같아요. 할머니 손이 고왔던 건 일이 쉬워서가 아니라,
할머니 마음이 너무 단단해서였다는 걸요."

예쁘게 칠해진 내 손톱 위로 할머니의 거칠지만 따뜻했던 손길이 겹쳐진다.
할머니는 그 재미없는 이야기를 통해 당신의 상처를 위로받고 싶으셨던 걸까,
아니면 당신처럼 고생하지 말라는 무언의 기도를 담으셨던 걸까.
화려한 네일아트 아래 숨겨진 내 손의 강인함이, 오늘따라 할머니의 굽이진 인생사처럼 묵직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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