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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11]딸에게 건네는 엄마의 '갈매나무' 편지 딸아,엄마가 최근에 유튜버 김겨울의 산문집을 읽으며 네 생각을 참 많이 했단다.그 책에는 딱딱한 의자와 문제집, 등급이라는 날카로운 현실 속에서 오로지 '시'만이 숨구멍이었다는 고백이 나오더구나.김겨울이 백석의 시를 빌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엄마의 학창 시절이 겹쳐 보여 마음이 먹먹해졌어. 동시에 네 번민도 보였단다.우리 예쁜 딸도 수능 공부를 하며 그 각지고 아픈 언어들 사이에서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까 싶어엄마는 김겨울의 글에 너를 투영하며 깊이 감정이입을 했어.늦게까지 미디어에 빠져 있는 네 뒷모습을 볼 때면, 그게 단순히 즐거움이 아니라 고단한 하루 끝에 정 붙일 곳을 찾는 안쓰러운 몸짓 같아 마음이 쓰여.엄마는 네가 백석이 노래한 그 '갈매.. 2026. 2. 10.
[산문시10] 설국(雪國)의 터널을 지나, 다시 개밥바라기별 아래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첫 장면처럼,기차가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오면 눈앞에는 온통 하얀 세상이 펼쳐지곤 했다.어린 시절 겨울방학, 판대역에서 내려 외가까지 걷던 그 십 리 길은 나에게는 바로 그 설국으로 들어서는 입구같다.이제는 그 멀고 험했던 길 위로 매끄러운 도로가 나 있지만,내 기억 속의 눈길은 여전히 차갑고도 포근한 원형의 풍경으로 남아 있다. 도시의 밤은 전등 스위치를 끄듯 갑작스럽게 찾아오지만, 시골의 밤은 다르다.낮은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나고,밤은 수줍게 앞을 나오며 서서히 서로의 자리를 바꾼다.그 느릿한 변화의 틈새에서 나는 그리움을 배운다.가본 적도 없는 시골의 폐교된 초등학교 건물을 보며 묘한 향수를 느끼는 것은,아마도 그곳이 누군가의 찬란한 유년을 품어냈던 '커다란 나.. 2026. 2. 9.
[에세이9]세자매의 ‘별 헤는 밤’ 1. 낱알 속에 새겨진 어머니의 전쟁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야 비로소 엄마의 어린 시절을 처음 들었다.전쟁의 포화 속에서 괴산으로 피난을 가야 했던 소녀.학교에 가는 대신 애기를 업고 살림을 해야 했던 원망스러운 기억과 아들만 바라보던 외할머니에 대한 해묵은 미움은 엄마의 마음속에 깊은 흉터로 남아있었다.서른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홀로 되어 4남매를 키워내야 했던 엄마에게 가난은 미덕이 아니라,자식들을 영세민으로 만들어서라도 어떻게든 살려내야 했던 비참한 생존의 전쟁터였으리라.남들이 이미 여덟 번이나 훑고 지나간 볏짚 사이에서, 엄마는 '키'를 까부르며 남은 낱알들을 모았다고 한다.바람에 날아가는 쭉정이 사이로 기어이 남겨진 무거운 알곡들.그렇게 모은 벼 한 말을 등에 메고 돌아온 엄마의 가방 속엔 쌀 반.. 2026. 2. 9.
[시8] 예감의 그림자 밤새 입안에서는 하얀 이가 우수수 빠지고 안개 자욱한 꿈결 너머로 아버지가 보였다.어디선가 들려오는 나직한 ‘음매’ 소 울음 소리,그 울음이 명치 끝을 찔러 가슴이 마구 아팠다.눈을 뜨니 베갯잇은 이미 젖어 있고 주룩주룩 흐르는 눈물 닦을 새도 없이 곁에 누운 엄마를 본다.아버지는 이미 오래전 저문 강을 건너셨는데꿈속의 아버지는 왜 자꾸만 나를 부르셨을까.꿈이어서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창백한 엄마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다.하지만 온종일 마음은 징 소리처럼 울려 학교 행사 중에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선생님, 집에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아요."거짓말 같은 진실을 뒤로하고 달려가는 길,골목 어귀에서 나와 꼭 닮은 표정의 동생을 만났다.불길한 예감은 왜 한 번도 비껴가지 않는지.너도 그랬구.. 2026. 2. 8.
[에세이7] 고운 손에 숨겨진 굳은살의 고백 어릴 적 외가에 가면 할머니는 늘 나를 곁에 앉혀두고 케케묵은 이야기를 꺼내셨다.솔직히 말하자면, 그 이야기는 어린 내게 참으로 시시하고 재미없는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하지만 할머니는 마치 처음 하는 이야기인 양, 매번 간절하고 열정적으로 당신의 고단했던 소녀 시절을 복기하셨다.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는 일찍 여읜 어머니와 새어머니, 그리고 동갑내기 의붓자매가 등장한다.새어머니는 친딸에게는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애지중지하며, 모든 설거지와 궂은일을 어린 할머니에게 몰아주었다고 했다. "얘야, 그 애는 손이 약해서 설거지 한 번만 해도 손등이 쩍쩍 터져나갔단다.그래서 내가 다 했지. 그런데도 네 할아버지는(친정아버지는) 내가 동생 일을 안 도와준다고 나만 혼내셨어." 할머니는 억울하고 서러웠던 그 시.. 2026. 2. 7.
[에세이6]놓치지 말아야 할 사랑의 온도 영화 의 흑백 화면은 지독하게 쓸쓸하지만,그 속에는 가난을 통과해온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는 묘한 동질감이 흐른다.1994년, 동생과 함께 머물던 자취방의 공기.명절이면 고향으로 가기 위해 청량리역에서 중앙선 비둘기호를 향해 숨 가쁘게 뛰어야 했던 대학 시절의 풍경이 영화 위로 겹쳐집니다. 표를 구하지 못해 매표원이 올 때마다 화장실로 숨어들어야 했던 그 서글픈 가난의 기억은,이제 거실의 은은한 조명 아래서 영화를 보는 안온한 현실로 바뀌었다.영화 속 샤오샤오는 젠칭에게 말한다. "I miss you." 젠칭은 "나도 보고 싶었어"라고 답하지만,샤오샤오의 진심은 "난 널 놓친 거야"라는 뜻이었다.잡지 못하고 놓아버린 것은 사랑일까?, 아니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젊은 날의 우리일까? 하지만 세상에는 절.. 2026. 2. 7.